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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너

  • 작성일 2014-01-03
  • 조회수 522

오랜만이다, 너

  “수준이 안 맞아.”

 내 입에서 시원스레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명치에서부터 점점 위로 답답한 기운이 올라왔다. 중고 텔레비전을 설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손과 시선이 그대로 멈췄다. 뒤통수가 텅 울렸다.

 동갑인 그는 야구를 좋아했다. 나는 야구의 기본 규칙조차 몰랐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함께 하고 싶은 신기한 마법에 걸려. 연애를 책으로 배우던 시절에 읽었던 구절이 이제는 실제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나섰다. 그를 따라가는 야구장이 좋았다. 옆에 앉아 열정적으로 응원만 하면 그에게 맞춰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거면 충분해. 책 구절이 나를 따라다니며 꾸준히 고개를 끄덕여 줄 거라고 믿었다.

 처음에 그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파울선 밖 응원석으로 떨어진 공이 홈런인 줄 알고 혼자 벌떡 일어나 소리쳤을 때, 그는 부드러운 손으로 나를 잡으며 앉혔다. 그리고선 내가 민망해할까 봐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괜찮아. 몇 박자 느린 응원과 잦은 실수를 그는 귀여워해 줬다. 그런 과정을 지나며 나는 야구에, 우리는 서로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게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이 되지는 않았다. 9회 말 원아웃 만루 상황이었을 때였다. 우리 팀이 1 대 0으로 앞서 가고 있었다. 이제 두 타자만 아웃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어려운 상황에 모두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타자석에 타자가 들어섰다. 첫 공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공은 가운데 쪽 펜스 앞까지 날아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외야수가 열심히 뛰어가 공을 잡아냈다. 나는 그를 끌어안고 제자리를 방방 뛰면서 소리쳤다. 그런데 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내 팔을 내치다시피 뺐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 시선과 몸이 멈췄다. 삼초 정도 나만의 적막이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편 응원석 쪽 사람들과 선수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1 대 2로 역전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민망하게 서 있는 나를 그는 외면했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잡아 뜯는 흉내를 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 수준이 안 맞아.”

  그때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음부턴 쉽고 입에 붙게 되는 법인 가보다. 야구를 보며 어쩌다 실수를 하면 그는 수준 타령을 했다. 그러다가 그가 한국시리즈 동안에 느닷없이 이별을 통보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선 날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하던 수준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의 사랑을 지속하는데 얼마나 필요한 수준이었으면, 고작 그런 것으로 사랑을 유지하고 끊는 너의 수준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 길래.’

  그 생각으로 한 달 가량 앓았다. 그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의 수준을 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해 야구 시즌은 종료된 터라 다시 보기를 통해 야구를 익혔다. 그에게 집중했던 두뇌가 처음으로 야구에만 집중해보는 시간이었다. 복습은 이전보다 비교적 보기 쉬웠다.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은 것들이 금방 이해되는 것들도 있었다. 잘 모르는 부분은 다행히 해설이 있었다. 그러나 해설로 충분하지 않은 것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어 익혔다. 나날이 야구 실력이 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그는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연락하지 않는 헤어진 연인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 끝에 블로그에 그날의 인상 깊은 장면을 짧은 웹툰 형식으로 올리기로 했다. 그는 나의 블로그에 들어와서 종종 댓글을 남겼었다. 어쩌면 내가 생각 날 때 블로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야구는 볼수록 신기했다. 그와 함께일 때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야구는 오밀조밀했다. 두근거리게 하는 스릴이 있었다. 다음을 기대하게 하고 결과를 궁금하게 했다. 야구에 대한 흥미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야구 실력이 늘어나는 만큼 웹툰도 발전했다. 처음 보다 꼼꼼하고 자세함이 묻어났다. 다른 웹툰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노력했고, 따뜻한 재미가 묻어나게 했다. 처음에는 이웃 블로거들과 몇 명의 사람들만 들어왔다. 그러나 포털 메인에 소개된 후부터 보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응이 좋았고 댓글도 많았다. 그럴수록 야구에 더 빠져들었다. 나 홀로 야구를 보게 된 첫 의도는 점점 바래졌다. 그가 머리와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리를 야구가 채우고 있었다.

 나 홀로 야구는 두 번째 시즌 중이었다. 나는 야구장보다 텔레비전을 선호했다. 편했다. 단지 그 이유였다. 작년까지는 거실 텔레비전으로 봤다. 동생이 텔레비전을 보려고 하면 야구만 보고 주겠다고 했다. 함께 야구를 보면 더 재미있고 좋으련만, 초등 여학생인 동생은 싫어했다. 동생은 고작 만화, 가요, 예능 등을 볼 뿐이었다. 야구를 포기하고 그것들을 함께 보기에는 흥미롭지 않았다. 처음에는 동생이 순순히 따라주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 했다. 열 시가 되면 자는 동생은 자기 직전에야 텔레비전을 보게 되거나, 잘 때까지 보지 못하게 되는 날이 반복되었다. 조금의 양보로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는 걸 알아버리고선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모양새를 취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거래였다. 동생에게 오백 원을 주며 야구하는 동안 텔레비전 독점권을 가졌다. 마다하지 않았다. 두 번만 모으면 천 원이 생겨서 트램펄린, 게임 도구, 노래방 등이 있는 실내 놀이터에서 놀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생에게는 크고 신 나는 돈이었다. 그렇게 나 홀로 야구 첫 시즌은 쉽게 야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시즌은 달랐다. 협상에 난항을 겪었다. 동생이 한 살 더 먹고, 한 학년 올랐다고 그 사이 부쩍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좋아하던 실내 놀이터를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유치해진 탓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돈이 필요 없는 건 아니었다. 동생에게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다. 남자 아이돌과 화장품이었다. 그것들로 자신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천 원으로 인상해서 매번 줄 수는 없었다. 오백 원과 천 원의 차이는 컸다. 무엇보다 그 돈으로 뻔히 보이는 불필요한 것에 투자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나만의 텔레비전이었다.

 새 텔레비전을 사기에는 돈이 넉넉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인터넷을 뒤져 중고 텔레비전을 구매했다. 그것을 오늘 택배로 받게 되었고, 내 방에 설치하는 중이었다. 지금은 일 때문에 같이 살지 않는 부모님 방에 놓을까 했다. 하지만, 곰팡이가 피고 벽지가 상한 탓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며칠 뒤에 도배를 할 것이었지만, 처음 순간부터 제대로 보고 싶었다. 또 다른 선택은 내 방이었다. 겨울에는 외풍 때문에 가장 추운 방이라서 내 방이지만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불필요한 물건을 가장 많이 쌓아둔 곳이었다.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텔레비전을 놓고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무엇보다 곰팡이 핀 안방보단 나아 보였다. 안방에 있는 쓰지 않던 텔레비전 받침을 내 방으로 끌고 왔다. 책상 옆벽 앞에 놓기로 했다. 책상 앞에 앉기라도 한다면 조금 불편한 위치였다. 하지만, 콘센트와 가장 가깝고 비교적 물건이 많지 않은 제일 깔끔한 곳이었다. 거기에 놓여있는 작은 상만 치우면 될 것 같았다. 작은 상 위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게 베란다 문 앞으로 살살 끌어당겼다. 그리고선 문 앞에 두었던 텔레비전 받침을 끌어서 그 자리에 놓았다. 책상과 대칭이 맞지 않아 별로였다. 그러나 야구를 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택배 박스 안에서 텔레비전을 꺼냈다. 그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엇을 하느냐는 말에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문제는 그때 터져 나왔다. 동생과 텔레비전을 같이 볼 수 없어 불편하다는 불만을 말할 때, 자연스레 내 입에서 ‘수준’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설치하면 이제 마음 놓고 야구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 날을 기대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가 설렘을 무너뜨렸다. 잊고 있었던 그의 아픈 말과 모습이 떠오른 게 싫었다. 그 말이 이제는 내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현재는 그의 야구 수준보다 떨어지지 않을 거란 걸 자신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른다는 자만심도 들었다. 그보다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됐다고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립지 않았다. 옛사랑이란 사실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저 잊힌 존재일 뿐이었다.

 책상 위에 있던 류현진 사인볼을 들어서 텔레비전 받침에 놓았다. 작년에 내 블로그 팬이 선물한 거였다. 자신은 사인볼이 두 개 있다며, 류현진 다음으로 팬인 나에게 선물하겠다고 했다. 더럽혀지거나 망가질까 봐 투명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오늘 다시 그가 떠올랐지만, 이제는 이런 존재일 뿐이다. 류현진 사인볼도 없을 주제에.

 투수는 1루에 두 번째 연속으로 견제구를 던졌다. 주자는 안정적으로 1루에 들어왔고, 별일 없는 일이었다. 이번엔 타자석에 있는 타자에게 공을 던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1루에 견제구를 던졌다. 1루수를 지나 공이 뒤로 빠져버렸다. 1루수의 어이없는 실수였다. 그 사이 주자는 2루로 도루하는데 성공했다. 내치듯 공을 글러브에 꽂으며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있는 1루수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내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공이었기에 더 그랬다. 경기는 끝나지 않았지만, 오늘의 장면은 이걸로 그려질 것이라고 짐작했다. 마지막에 쓸 문구가 떠올라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었다.

 -잠깐 다녀올게요, 공 올림-

 ‘꺅.’

 저장을 누르자마자 거실에서 동생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스마트폰을 바닥에 탁 놓고, 얼른 문을 열고 나갔다. 내가 나온 걸 인식한 동생은 나 보라는 듯 소리를 더 크게 외쳤다. 주먹 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서 돌렸다. 텔레비전에서는 기계음이 잔뜩 섞인 댄스 음악이 흘러나왔다. 텔레비전 화면을 볼 거 없이 아이돌을 보고 소리치는 거라는 걸 알았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그렇게 소리치면 어떡해!”

 “멋있지 않아? 그치, 그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동생이 신 난 표정으로 말하면서 집게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았다.

 “아니.”

 건조하게 대답했다. 솔직했다. 관심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말 멋있지 않았다. 아이돌은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선 춤을 추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마냥 애처럼 보였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앉기도 전에 점수를 확인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거실에 다녀온 사이 역전되어 있었다. 상대팀이 투 아웃 상태에서 일 점을 득점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2루로의 도루가 성공한 것이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입속에서 이가 서로 밀어내기를 했다. 그래 봤자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화나는 상황에서 일단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매번 느꼈다. 각본 없는 실제 이야기의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느냐 아니냐는 똑같은 화의 종류여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였다.

 ‘출입 금지’

 올해 들어서 동생은 자신의 방에 들어올 때, 꼭 노크하고 들어올 것을 강요했다. 숨길 것이 있어서인지, 혼자 있고 싶어서 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었다.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씁쓸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방보다 거실을 좋아하던 동생이 불과 일 년 사이에 확 달라진 모습 때문이었다. 처음 입단해서 오랜 시간 함께 하던 선수가, 자유계약 선수가 되자 다른 팀으로 떠날 때의 느낌이 이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사춘기가 되는 당연한 과정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지켜보는 것이 어른의 참모습이라 되 뇌였다. 물론 잘못되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만 이었다. 그래서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화장이었다. 외모와 겉치레에 신경 쓰는 건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꾸기 위해 초등학생이 화장을 한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요즘은 초등학생부터 화장을 한다는 걸 많은 매체를 통해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생은 자신의 까무잡잡한 피부를 싫어했다. 그것만의 매력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무조건 하얗고 뽀얀 피부를 원했다. 게다가 이마에 하나씩 나기 시작하는 여드름을 매일 신경 썼다.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진다고 말해도 그날이 당장 눈앞의 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절망했다. 미백 효과가 있는 화장품을 사줄 것을 요구했다. 단번에 거절했다.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란 한마디로 모두 설명되었다. 마음속으로 동생을 믿었다. 어른의 허락으로 해야 할 것들에 대해 허락받지 못한 것은 하지 않으리란 것을.

 야구가 올 시즌 들어 처음으로 우천 취소됐다. 일기 예보는 늦은 오후가 되면 비가 그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비가 세게 내렸다. 결국 야구는 진행할 수 없었다. 일기 예보를 믿고서 오늘 야구를 하지 않으리란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게다가 낮에는 약한 비만 내렸을 뿐이었다. 머릿속에 조금씩 짜증이 밀려오려는 걸 다른 생각으로 간신히 막았다. 한 달 동안 시간이 맞지 않아 미뤄오던 친구를 만나서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내기로 한 거였다.

 동생 방에 있는 전신거울로 내 상태를 봤다. 아침에 머리를 감았는데도 머리카락이 부스스했다. 지저분하고 초췌해 보였다. 평소에 쓰던 빗으로는 머리카락이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더 작은 빗이 필요했다. 동생이 자신의 파우치에서 작은 빗을 꺼내던 모습이 생각났다. 혹시 있을까 하고 파우치를 열어봤다. 열자마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뒷머리를 누가 세게 치는 것 같았다. 파우치 안에는 틴트, 파우더 팩트, 블러셔 등이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그것은 곧 화로 이어졌다. 동생이 오면 무작정 따지고 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장품 중 내가 사주었던 로션은 제외하고, 모조리 뺏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을 함부로 열어 봤다는 이유로 마음을 닫아 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엔 괘씸했다. 일단 모른 척 지내보기로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동생이 화장품을 이용할 때 모른 척하고 들어갔다가, 처음 화장품을 발견한 척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것에 대해 따질 때는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앞서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는 기본 이란 게 문제지만 말이다.

 일요일 밤, 가족 모임을 마치고 형부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뒷좌석 내 옆에 앉아있는 동생이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 밤이라 차안이 어두웠다. 눈이 나빠질까 염려스러워 끄기를 종용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어떤 말을 할지 바로 눈치챈 동생이 얼른 말하며 방어막을 쳤다. 알림장을 보는 거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알림장을 십여 분 동안 본다는 건 말이 안됐다. 다른 거 하다가 이제야 알림장 보는 거겠지. 이 말로 방어막을 뚫고 공격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동생이 내 무기는 보지도 않고 뜬금없는 폭탄을 던졌다.

 “포스터 해오래!”

 귀에 들어간 폭탄이 머릿속으로 들어가 터졌다. 순식간에 온몸에 짜증이란 화염이 번졌다.

 “미리미리 알림장 확인하라고 했지! 만날 스마트폰 가지고 놀면서 그런 건 이제 보면 어떡해!”

 짜증은 짜증대로 온몸을 돌아다녔다. 그와 별개로 화가 홀로 솟구쳤다. 오 분 뒤에 집에 도착하지만, 그건 안도감을 주지 못 했다. 집에 도화지의 유무를 알 수 없었고, 없다면 문방구에 가야 했다. 문제는 일요일에 영업하는 문방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운 좋게 찾는다고 해도 문 닫을만한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낮에 했던 야구 경기 때문에 몰래 답답했던 가슴이, 이제는 드러내놓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얼른 신발을 벗고 동생 방으로 퉁퉁 뛰어갔다. 미술에 쓰는 종이를 모아둔 종이 가방을 뒤집어서 쏟아 낸 뒤 도화지를 찾았다. 다행히 사절지가 한 장 있었다. 새하얘야만 하는 도화지는 귀퉁이부터 조금씩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언제 내가 이 집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오래됐음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거나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사절지 규모만 맞으면 되는 거였다. 어차피 포스터물감으로 선생님이 보실 부분은 싹 덮어버릴 거였다.

 도화지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동생은 손도 씻지 않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거실 바닥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 얼마 전, 분명한 볼을 두 번 연속으로 스트라이크 판정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의 당사자인 타자는 아웃을 선언 받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방망이를 바닥을 향해 힘차게 내동댕이쳤다. 방망이가 두 동강 났다. 타자의 얼굴은 화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방망이가 있기는커녕 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빨래를 삶을 때 사용하는 막대기가 벽에 기댄 채 서있었다. 그것을 얼른 집어 들고 동생 앞으로 갔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런 거 할 때야?”

 동생이 스마트폰 전원 버튼을 누르고 살짝 던지듯 놓았다.

 “알았어.”

 대답이 건조했다. 조금의 반항기도 들어있었다. 방으로 가려는 동생을 붙잡고 똑바로 서라고 했다. 건들건들 오더니 섰다. 모습 하나하나가 화를 돋웠다. 화는 지난 일도 끄집어내는 버릇이 있었다.

 “네가 할 일이 있으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리고 너! 화장품 어디서 났어!”

 “그거 봤어? 왜 남의 것을 보고 난리야!”

 동생이 버럭 화를 냈다.

 “일부러 본 게 아니라, 뭐 좀 찾다가 봤다. 네가 산 거지? 돈은 어디서 나서 샀어!”

 “용돈 모아서.”

 용돈으로만 모아서 산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증거도 없는 그 과정을 들추어내자니 시간만 지체될 것 같았다.

 “화장하면 피부가 더 나빠진다고 했지! 만날 피부 걱정하면서 지켜야 할 건 안 지키는 건 뭔데!”

 “내가 만날 해? 아주 특별한 날에만 하거든? 그리고 언니가 뭘 알아. 애들은 다 한단 말이야. 나 정도면 조금 하는 거야. 그리고 애들끼리 이야기할 때 화장품 모르면 안 돼. 말이 안 통한다고. 게다가 십대 화장품이라 괜찮아.”

 동생은 마치 속에 맺혀 있던 걸 그동안 참았다는 듯이 쉼 없이 쏟아내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어떤 것에 대해 기본 상식으로만 봤을 때 나쁜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하거나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이해가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럴 땐 결과적으로 그것을 나쁘다고 해야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결국 많은 부분을 따져보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머리는 나에게 그걸 요구했다.

 동생이 방으로 들어 간지 십여 분 지났을 때 방문이 열렸다. 도화지 외에 포스터를 그리는데 필요한 나머지 도구를 들고 느린 걸음으로 쭈뼛쭈뼛 걸어 나왔다. 도화지 옆에 그것들을 탁 놓았다. 언니는 화가 나있고 비밀은 들켰다. 그러나 포스터는 해야겠고 밤 열시가 되어 가는 늦은 밤에 혼자 하려니 벅찼을 거였다.

 거실에 도화지를 가운데에 놓고 동생과 마주 앉았다. 서로 무기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혼자 하라고 하고 싶었다. 당연한 말인데도 할 수가 없었다. 포스터를 완성할 때까지 나도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구 기사를 빨리 보고 싶었다. 블로그에 웹툰도 올려야 했다.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동생이 포스터를 최대한 빨리 완성하고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포스터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그려?”

 “뭐? 내가 그런 것까지 알려줘야 돼?”

 마음잡고 앉아 있는 내게 묻는 동생의 말은 기가 막혔다. 육 년 동안 쭉 해온 덕분에 방법은 충분히 알면서 묻는 게 황당했다. 화장으로 어른 흉내를 내고 싶으면서 이럴 땐 어린이이기를 바랐다. 내 표정을 읽은 동생이 그냥 대충 그리겠다고 선언했다. 나도 속으로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표현은 하지 않았다. 대충 해서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분명 내 탓을 할 동생이었다.

 동생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야구 기사를 보았다. 그러다가 슬쩍 눈을 돌려 그림을 보았다. 동생은 정말 그림을 대충 그리고 있었다. 가운데에 불을 크게 하나 그리고, 주변에 나무와 산을 그렸다. 글씨는 색칠을 다 하고 그 위에 검은색으로 쓴다고 했다. 어떤 글씨를 쓸지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나무가 타면 야구 방망이 못 만들어요.”

 야구 기사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만 했다. 머릿속에서 불현 듯 떠오른 문장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말했지만, 생각해보니 신선했다. 약간의 기대감으로 동생을 보았다. 그러나 동생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며 만날 야구 타령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글씨는 색칠하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색칠하는 동안 스마트폰 기사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낮에 있었던 야구 경기 때문에 기사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 팀 선수가 3루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포수와 부딪혀 팔에 부상을 입었다. 우리 팀 에이스였기 때문에 혹시라도 큰 부상이면, 앞으로 경기에 차질이 빚어질 거였다. 선수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새로 고침을 계속 누르며 새로운 기사를 확인하고 있던 거였다. 사람들은 댓글로 그를 응원했다. 하지만 곳곳에 잘 됐다는 악플도 있었다. 어차피 보지 못하겠지만 댓글을 달았다.

 ‘힘내요. 다 잘 될 거예요.’

 확인을 누르자마자 동생이 빨리 좀 색칠하라고 재촉했다. 네가 나한테 이런 식 이면 더 이상 도와주지 않겠다고 도리어 쏘듯이 대꾸했다. 동생은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묵묵히 색칠을 했다. 나는 왼손엔 스마트폰, 오른손엔 붓을 들고 양손이 서로 전혀 다른 일을 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블로그에 그릴 오늘의 장면을 생각했다.

 도배하는 날이 오일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생활하는 집을 도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잡다한 물건들을 이삿짐 싸듯이 싸야 했다. 이때다 싶어 버릴 건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물건들을 다 싼다고 해도 놓을 자리가 만만치 않았다. 도배하는 김에 집을 최대한 말끔히 정리하고 싶었다. 책꽂이에 있던 책을 땅에 꺼내놓고 보니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읽는 책은 놔두고 공부했던, 지금은 펼쳐보지 않는 책은 최대한 버리기로 했다. 책들 사이에는 여러 파일들이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쓰던 파일, 박람회에서 나눠준 파일, 동생이 유치원과 학교에서 쓰던 파일 등이었다. 내 것은 낡고 지저분한 파일들 속에서 쓸 만한 파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제일 반반한 세 개만 챙기고, 동생의 파일을 훑어보았다. 동생이 유치원과 학교에서 공부와 생활했던 흔적이 쭉 있었다. 곳곳에 사진도 붙어있었다. 당시에는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 보니 반가웠다. 야구가 한 시즌을 마감할 때, 그동안 활약한 주요 장면을 볼 때의 느낌을 닮아 있었다. 과거를 다시 만나 가슴을 사르르 아름답게 녹이는 건, 좋은 마음이 유효하고 있기 때문일 거였다.

 동생의 파일을 상자에 잘 넣어두었다. 그러고 나서 방을 둘러싸고 있는 잡다한 물건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통일성 없는 잡다한 물건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들을 추리는 일은 더 고됐다. 작은 물건들이 많아서 빨리 줄지 않았다. 버릴 것들을 보니 오십 리터 쓰레기봉투로 세 묶음 정도 나올 것 같았다. 쓰레기는 나중에 한꺼번에 버리기로 했다.

 텔레비전을 놓기 위해 옮겨두었던 작은 상을 정리했다. 맨 위에 있는 달력을 치우니 천으로 된 손가방, 바둑 판 순으로 쌓아 올려 있었다. 그것들을 치우고 나니, 컴퓨터 키보드가 있었다. 처음엔 맨 위에 있었을 키보드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위로 올라오는 것들에 눌린 채 무게를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거였다. 키보드를 보니 2년 전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들이 좋아 보인다. 하고 싶어 한다. 동생도 다르지 않았다. 동생은 그 당시에 병원 놀이를 했고, 몇 달 뒤 시들어지자 회사 놀이를 했다. 요즘에는 한참 하지 않은 놀이였다. 그 놀이를 하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유아들이 하는 소꿉놀이와는 조금 달랐다. 자세함과 꼼꼼함이 있었다.

 병원 놀이는 진찰을 하고 주사를 놓는 게 끝이 아니었다. 병원에 가면 하는 기본적인 과정들을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접수증에 이름,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를 꼭 써야 했다. 치료를 할 땐, 화장 솜을 이용하여 소독을 했고, 핀셋으로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볼펜으로 팔에 덧대기도 하고, 그리고, 그리고… ….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동생은 분명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많은 과정으로 치료하곤 했었는데,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더 생각해 내려고 미간을 찌푸리는데 엉뚱하게도 내가 미소 짓다가 실실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 눈은 동생이 치료하고 있는 팔을 응시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그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길을 걸으며 잡은 그의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가슴에 솜털이 둥둥 떠다닌다. 그 모습을 자꾸 되뇌며 웃고 있는 거였다. 화들짝 놀라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당황스러웠다. 오늘의 야구 주요 장면을 보고 있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축구로 넘어갔을 때 느꼈던 기분 같았다.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키보드의 밑 부분을 보았다. 키보드를 세우는 짧은 다리가 망가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다리를 펼쳐서 바닥에 놓았다. 동생은 그런 키보드를 책상에 놓고 회사 놀이를 했다. 가상의 컴퓨터였다. 자신을 사장님이라고 부르게 했고 나를 이 대리라고 불렀다. 사원 증에는 이름, 주민등록 번호, 전화번호는 물론, 혈액형과 별자리까지 쓰게 했다. 그리고선 소설책 아무 쪽을 펴서 노트북에 옮겨 쓰도록 했다. 그것이 오늘 회사에서 할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귀찮으면서도 얼른 하고 끝낼 마음으로 타자를 쳤다. 세 네 줄 치다가 턱에 손을 괴었다. 눈은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머리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커피숍 의자에 대충 비스듬히 앉아 커피 잔만 쳐다보고 있다. 얼굴은 무표정이다. 마주 앉아 있는 나는 요즘 들어 부쩍 연락이 줄어든 그를 눈치 본다. 동생이 시킨 일을 하다 말고 고민스러운 요즘의 모습과 느낌을 떠올리고 있는 거였다. 동생이 빨리하라고 다그치면 나는 짜증을 내며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선 두세 줄 쓰다가, 다시 그의 생각으로 멈추는 것을 반복했다. 다시 떠오르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또 세차게 저었다. 동생이 회사 사장님으로서 하는 일은 내게 일거리를 준 것 외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귀에 들리던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만 따로 기억될 뿐이었다. 분명히 동생은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생각에 집중하느라 그것들은 저장되지 않은, 스쳐간 기억이 되고 만 것이었다.

 동생의 놀이를 생각하면 자꾸 그의 생각으로 장면이 전환되었다. 동생의 모습이 떠오르다가 그에게 덮여버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이 끔찍했다. 속에서 화가 끓어오르더니 급기야 내 손에서 키보드를 바닥에 탁 놓게 했다. 그리고선 힘이 들어간 혼잣말을 내뱉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네가 아니야.”

 키보드를 보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키보드가 바닥에 다소곳이 있었다. 키보드를 들어 손으로 살짝 쓸었다. 그깟 놈 때문에 괜히 동생의 키보드에 화낸 것이 미안해졌다. 키보드를 들고 동생의 방으로 갔다. 키보드 다리를 쫙 펴고, 동생의 책상 위에 놓았다. 도배 때문에 어차피 책상을 치워야 하지만, 치우기 전까지 만이라도 놓아두고 싶었다.

 쉬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화는 쉽게 풀리지 않고 오히려 이상한 자극을 했다. 그가 궁금하지 않았지만, 나보다 못 살고 있기를 바랐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스마트폰으로 페이스 북에 들어갔다. 그의 이름을 쳤다. 흔하지 않은 이름 덕분인지 첫 줄에 바로 나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에 조금씩 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의 이름을 눌렀다. 로딩 시간은 짧았다. 순식간에 바뀐 화면에 웨딩 사진이 있었다. 머릿속이 텅 울렸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렸다. 그와 어떤 여자였다. 천천히 밑으로 내려 보았다. 모바일 청첩장이 있었다. 그것을 누르려다가 바로 밑에 있는 글을 발견했다.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짧게나마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화면에서는 이것이 전부였다. ‘더 보기’를 눌러 나머지 글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전체 내용이 얼마나 되나 보려고 쭉 내려 보는 데 내용이 길었다. 절대 짧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왼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 삐뚤어지게 비웃으며, 나머지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한 문장에서 갑작스레 머릿속이 걷잡을 수 없이 엉켰다. 내 눈을 의심하며 다시 읽었다.

 ‘3년 전 여름에 처음 만나 저의 편지 고백으로 사랑이 시작… … .’

 그와 헤어진 건 한국 시리즈 중인 가을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그 보다 앞선 여름에 만났다고 되어 있었다. 요동치는 가슴을 견뎌내며 끝까지 읽어 보기로 했다. 끝쯤에 있는 글은 내가 알고 있다고 단단하게 믿었던 것에 강렬하게 빗금을 그었다.

 ‘그녀는 아직도 야구에 대해 잘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평생 알려주면 되니까요. 무엇보다 그녀의 일상을 보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임을 아주 잘 압니다. 남은 인생을 그럴 수 있다니, 무척 기대되네요.’

 엉킨 머릿속은 급격히 뛰는 가슴과 온몸에 쫙 퍼져버린 땀을 따라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추리도 싫었다.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꽉 쥐었다.

 동생은 학원에서 오자마자 요즘 늘 그렇듯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 이거 어디서 찾았어?”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오늘 야구 선발 기사를 보고 있는데 동생이 나를 향해 외쳤다. 얼른 일어나서 동생의 방으로 가려는데 몸이 무거웠다. 몸살 날것처럼 쑤셨다. 짐을 정리하느라 그런 건지, 그에 대한 충격에 몸이 반응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나아질 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에 도착하자 동생은 키보드를 들고 요리조리 보고 있었다.

 “아, 그거 방 치우다가 보니까 작은 상에 있던데?”

 “아 진짜?”

 동생은 자신이 함부로 버려두고서 찾은 게 좋은지 깔깔 웃었다. 키보드 다리가 펴있는 것을 확인하고, 책상에 다시 살짝 내려놓았다. 그리고선 해맑은 얼굴과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회사야.”

 뒤통수가 번쩍였다. 그리고 가슴에 부드러운 어떤 것이 번지고 있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내 두 눈앞에 실제로 진행되려고 했다. 잊어버렸던 기억의 부분을 대신 채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집중했다. 내게 일을 시킨 뒤, 분주한 소리로만 기억되고 있는 사장님으로서의 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확실히 보려고 마음잡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은 더 이상 회사에 대한 어떠한 말과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키보드에서 뗀 동생의 손이 학원 가방으로 갔다. 앞 지퍼를 열더니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름을 모르는 아이돌 사진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오기만 하면 동생이 소리 지르던 아이돌인 것 같았다. 동생은 테이프를 뜯더니 그것을 책상에 붙였다. 즐거움이 가득 든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멋있지?”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책상에 살포시 놓았다. 동시에 선발 기사로 채워져 있던 화면이 까만 화면으로 바뀌었다. 시선을 돌려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에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내 눈에 그들이 멋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관심 있는 것처럼 자세히 보았다.

  “응, 멋있다. 특히 얘가 제일 잘생긴 것 같아.”

 집게손가락으로 제일 잘생겨 보이는 사람을 찍어서 말했다. 동생은 기대하지 못한 대답을 듣고 신이 난 모양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목소리가 흥분된 채 말을 쏟아냈다.

 “그치, 그치. 이 오빠 다음 달에 영화도 찍는대. 개봉하면 같이 보러 가자. 알았지?”

 “그래. 그땐 네 거 분홍색 틴트 발라도 돼.”

 동생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동생이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저장해 둔 아이돌 사진을 보여주었다. 옆에 바짝 붙어 서서 그들에게 집중했다. 동생은 신 나게 설명하느라 입이 바빴다. 나는 다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오’나 ‘아’ 등의 감탄사도 넣었다.

 야구가 시작하려면 아직 한 시간은 있어야 했다.